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DeepDive Intelligence

인간은 죽임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가? #1 본문

카테고리 없음

인간은 죽임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가? #1

imzozo 2025. 8. 31. 02:29

인간은 오랜 기간동안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현대에 와서 발현된 특성이 아니며, 아주 오랜 옛날 옛적에 인간들이 아직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던 시절인 수렵채집 문명 단계에서부터 인간들은 함께 동굴속에 모여 서로간에 유대감을 나누고 집단을 형성해왔다. 이 시절 인간이라는 종에게 있어 무리이자 집단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형성하고 유지하는데에 실패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치명적인 상황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시절 인간들은 서로 모여 부족을 형성하고, 가족을 만들어왔다. 이 가족은 아직 현대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엄마, 아빠, 자식간의 문화적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어쨌든간에 개인들이 모여 가족이 되었고, 가족들이 모여 부족이 되고 결국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였다.

 

우리 인간종은 이런 수렵 채집 문명을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어왔다.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의 가장 시초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300만년 전에 발생했지만, 인간들이 모여 가장 최초로 ‘문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이룩하기 시작한것은 10,0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중 대부분의 기간은 농업을 기초로 문명이 발달했기 때문에 인구수가 곧 먹여야 할 사람의 수였고, 전세계에는 대략 6억명에 달하는 인간들만이 존재했다.

 

이중에서도 정말 인류의 황금기라고 부를만한 시기는 18세기 영국에서 비롯된 산업 혁명의 여파로, 과학 및 공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인류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모든 산업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분명 인간은 지금까지 300만년씩이나 존재해왔지만 그중에서 문명을 이룩한것은 1만년 전후이고, 그 안에서도 우리가 아는 근대 문명이 발생하기 시작한것은 길게 쳐줘야 3-400년 내외라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곧 집단의 부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점진적 세계화라고도 설명 가능한 인간 역사의 발전은 부족 사회에서 지역 사회, 국가 사회, 범국가적 연맹 사회로 발전해나가며 그 규모를 계속해서 늘려왔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집단이였던 원시인들의 부족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인구수의 한계가 명확했다. 부족 구성원들마다 자신들에게 각각의 역할이 명확하게 주어져 있었으며, 이를 정상적으로 수행해야만 부족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부족에서 생산하는 자원과 소모되는 자원의 값이 명확하게 눈에 보였으므로 어느정도의 인구수를 유지해야 할지 계산하기 간편했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시간이 지나며 원시 형태의 지역/국가 사회라고도 부를 수 있는 부족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아군과 적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환경에서 서로 소속이 다른 두 집단이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장소에 위치한다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런 충돌을 작은 규모에서 점점 더 큰 규모로 늘려왔고, 그에 따라서 인간들의 소속된 집단의 규모 또한 계속해서 커져만 왔다.

 

이러한 대집단간의 충돌은 단순히 교전이나 전투에서 끝나는 경우가 없었으며, 수많은 인적 자원과 식량, 냉병기, 전투 식량등의 물자를 총동원한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적국이 소유한 지정학적 토지의 소유권을 강제로 빼앗아 국력을 강화하고 지형적/자원적/물리적 우위를 점거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원전 259년, 중국의 진시황은 한가지 꿈을 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없는 세상”으로, 당시 세계관의 전부였던 중화를 평정하고 모든 국가들을 ‘진’의 것으로 만들면 더이상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눈에 보이는 모든 국가들을 군사력으로 짖밟고 게양된 국기를 부러트려 자국에 강제로 병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 행동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은 금세 무너졌고, 한, 수, 당, 송, 원, 명, 청. 모두가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며 또 다시 피가 흘렀다. 이번에는 더욱 큰 스케일로 말이다.

 

이처럼 역사가 보여주듯, 인간이 발을 내딛은 땅에서는 언제나 피가 흘렀다. 예전부터 그 장소에서 쭉 살아온 원주민과의 싸움이든, 점령한 땅을 놓고 갈등을 빚은 문명인들의 싸움이든, 지배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해온 싸움이든 간에 인간이 점령한 땅은 단 한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인간이 점령한 곳에는 언제나 싸움이 있었고, 인간이 점령하지 못했거나 점령할만한 가치가 없는 땅에서만이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본인들이 선임을 자칭하며 정복 활동을 해왔지만, 그 끝에는 항상 피가 튀길 뿐이였다. 그들이 피를 흘리지 않은 곳은 깊은 바다나 울창한 삼림지대일 뿐, 언제나 그들이 위치한 곳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우리의 역사는 인간과 전쟁을 떼넬 수 없다고 증명하는듯만 하다. 전쟁이 비통한건 누구나 안다. 누군가의 자식이 죽으며, 평생 살아온 땅과 집을 빼앗기고, 이룩해온 모든 것들이 불타버리는 고통은 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누구도 그런 고통은 겪고 싶지 않아한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인간들은 피에 자력처럼 이끌리듯 힘을 키우고 세력을 만들어서 결국 종국에 가서는 서로 부딛쳐 그렇게도 싫어하고 기피해오던 전쟁 일으키고야 만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수도 없는 싸움과 전쟁과 폐허와 비애를 수도없이 겪고서, 또다시 새로운 싸움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인류는 100억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고, 더이상 의료 기술이 정복하지 못한 질병은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먹을수 있을만한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으며, 전 지구를 모두 정복하여 수백개씩이나 되는 국가가 생겨난 지금 이 시점에서도 인간은 계속해서 싸운다. 그 수많은 비참함을 겪고 나서도 또 싸우고야 마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든 상관없다. 지정학적 요인이든, 이데올로기의 충돌이든, 민족간의 갈등이든 상관없이 인간은 어느 시대든 어느 시간이든지 상관없이 무엇이든 이유를 붙혀서 싸워왔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을 멈추지 못할거다.

왜일까. 왜 우리는 전쟁의 비애와 고통을 겪고서도 계속해서 싸우는걸까? 인간이 못나서인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것이 원래 정복하기 위해 태어나서?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의 피 안에 흐르는 어떤 유전적 요소가 집단을 만들고 결국 싸우도록 부추기라도 하는 것인가? 어째서 평화는 일시적일수밖에 없으며, 인간은 결국 또 다시 전쟁이라는 고절한 종착지에 도달하고야 마는가?


 

이번엔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전쟁이라는게 없다면? 싸움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면 어떨까? 그런게 가능할리가 없지만 한번 상상해보는 것이다. 현대 인류의 문명 수준과 성숙한 사회를 갖고도 절대, 그 무슨일이 생겨도 싸우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전쟁이나 전투, 싸움으로 죽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까?

 

애초에 싸움이 없었다면, 전쟁이 없었다면 인류의 최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싸움이자 전쟁의 본질은 바로 ‘개인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투쟁한다. 인간이 그렇고, 수족관 속의 물고기도 그렇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하나하나도 그렇다. 이 자연이, 생태계가, 원자가, 분자가, 우주가, 모든것이 전부 다 ‘투쟁’ 상태 안에 있는 것이다. 모든것이 태어나고 먹고 먹히고 늙고 사라지는 순환 속에 있다. 인간부터 우주까지, 작은 개미 한마리까지 전부 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투쟁하는 종이다. 정확히는 인간이라는 개인은 언제나 투쟁속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 문명화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투쟁 본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있는 것이다.

 

한번 예시를 들어보자. 당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3분 거리에는 한 편의점이 있다. 당신은 지난 6개월간 그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왔다. 다른 알바보다 좀 더 편하기는 하지만, 편의점 사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 무시하고 꼽주는 말투나 이런것들이 계속해서 거슬렸지만 어쨌든 일이니까 참고 지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아침에 뉴스를 보고있는데, 내가 사는 이 지역이 갑자기 군사분계선으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당장 내가 어제까지만 해도 출근하던 편의점은 이제 적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선 너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적국의 시민들이며, 그들의 사업체 또한 모두 적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속에서 당신은 오늘도 평소처럼 편의점에 도착하고, 아침 뉴스로 인해 잔뜩 예민해져 있는 사장을 마주하게 된다. 안 그래도 마음도 심란한데 출근하자마자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편의점 사장을 보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고개를 들고 마는 것이다.

 

“이 사람 이젠 적이잖아.”

 

당신의 눈빛이 조금 바뀐다.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사장은 갑작스레 바뀐 분위기에 흠칫거리고 만다. 둘 사이에 약간의 불안한 적막이 흐른다.

 

이런 경우에는 어떤가? 우리의 투쟁이 목표를 포착했을때 인간은 완전히 바뀐다. 사실 정확히는 바뀐게 아니고 그 본성을 되찾은 것이다. 인간은 투쟁하는 생물이며, 그 목표가 사업, 지식, 공부, 학교, 승진, 운동같은 목표로 바뀌었을 뿐이지 인간의 투쟁하는 본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예시를 든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 사람의 상황이 모두 다르고 성격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에 놓이자마자 서로를 적대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상황이 나쁘게 전개되더라도 서로간에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투쟁하는 생물인 것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투쟁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입는 옷 또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책이나 펜이나 선풍기나 에어컨이나 문이나 마이크나,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투쟁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어떤 다른 생물을 죽이지 않고서는 고기를 섭취할 수 없으며, 동물을 살해하지 않고서는 옷을 지어서 입을 수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발전하여 완벽한 비건 생활을 할 수 있고 완벽한 인조 조직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인간의 본질이 투쟁이고 그 투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싸우지 않고, 싸워서 얻은 것도 사용하지 않으며, 싸워서 얻어낸 음식을 먹지 않고, 싸워서 얻어낸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서는 계속해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소를 죽여서 고기를 얻지 않는다고 해서 소가 무한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이나 유기물인 풀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풀이 자라기 위한 영양분 또한 동물이 죽어서 만들어진 자원이 순환해서 생긴 흙으로부터 기인한다. 순환은 본질적으로 생과 죽음이며, 그 과정에서 투쟁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순환의 본질 자체가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더라도 세상 어디선가는 무한하게 투쟁이, 싸움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당장 수백만년 후의 현대 인류중 ‘소수가’ 그런 투쟁을 멈춘다고 해도, 그들이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수백만년 전 어느 한 원시 인류가 부족 전쟁에서 다른 인간의 대갈통을 부수고 전쟁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존속 자체가 투쟁의 결과물이고 우리는 그 연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더 나아가자면 국가가 소지한 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단순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땅을 예로 들어보자면, 토지 자체는 적은 편이 아니다. 산이 많을 뿐이지 실제 토지 면적은 절대 작지 않다. 인구 밀집현상? 한국 땅을 전부 다 쓴다는 가정하에 집집마다 거리가 100미터가 넘게 만들수도 있다. 서울 땅 면적을 600km가 아니라 6,000km로 만들수도 있다. 가능하다! 가능은 하다. 근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토지가 아무리 넓더라도 그중에 인프라를 밀집시킬 수 있는 지역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로 서울을 2배 크게 만드는것은 절대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막말로 서울 인프라 전체를 부산, 대구, 대전, 세종, 어디로든지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서울과 주변 광역시들을 더욱 발전시키고 밀집시켜 도쿄와 같은 메가 시티로 만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가능은 하다. 그렇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인프라가 총 밀집된 도시인 서울이 확장이 어렵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 서울특별시에서는 1천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수치이다. 이미 도시 허용치를 옛날에 넘었으며, 박정희 정권인 70년대부터 수도 이전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서울 사회는 두가지 선택지를 마주하게 된다. 서울시 인구수를 줄이던가, 아니면 서울시를 확장하던가. 둘다 쉽지 않는 선택지다. 그동안 회피해온 논제인 만큼 건들곳과 손봐야 할 곳이 수도없이 많다. 너무나도 반대할 요소들이 많아서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도 확실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환경을, 도시를, 인프라를 확장하지 못한다면 차선책을 고를 수 밖에 없게된다. 그것은 바로 인구수를 억제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죽는 사람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사람을 줄이는 것. 출생률을 억제해버리는 것이 방법이다. 그리고 한국은 이 방법을 선택한지가 꽤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구를 늘리고, 서울을 늘리고, 국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상태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정복 활동을 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다시금 레벤스라움 개념에 도달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지정학적 토지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 논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게 불가능하다.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불가능하다. 허락해주지 않는다. 이 땅에 ‘제어 권한’을 가진 한국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나라의 건국부터 단 한번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우리가,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국가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적극적인 전쟁 국가로 변모하는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복 활동을, 제국을 만들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게 불가능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피가 너무나도 희석되고, 수많은 강대국들이 꼳아놓은 침들로 인해 이 나라가, 사회가, 민족이 절대 공격성을 가지고 정복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는 인간들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투쟁 본능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투사하고 만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환경 속에서 너무 많은 인구수를 집어넣으면 서로 싸우기 시작하고, 결국은 계급이 공고화되고야 만다. 이것은 이미 쥐들의 유토피아 실험으로도 검증된 이야기다. 특히 한국은, 서울은 더욱 특수한 환경에 속해있다. 원하는 자원 (돈, 집, 차, 옷, 지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는데, 경쟁자는 너무 많고 계급은 공고하다. 높은 계급인 소위 금수저를 물려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쾌적하게 살아가는 것에 비해, 타고난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며, 상위 층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하위 층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된다.

 

이처럼 상위 층이 매우 적고 하위층이 많은 사회 환경에서는 공통적으로 특정 현상이 포착된다. 그것은 바로 ‘천민자본주의’이다. 천민층, 한마디로 하위층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들이 생산하는 문화 컨텐츠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재가 게속해서 늘어남에 따라서 하위층이 주도한 사회 문화가 생겨나고야 만다. 중산층이 줄어들고 하위소득층이 늘어나는 사회에서는 고급 문화와 예절, 식사 매너와 같은 것들이 다수 생략되고 편의주의, 황금만능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야 만다.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중산층이 많으면 된다. 중산층이 많으면 이 사람들을 타겟으로 한 소비재와 문화 요소들이 생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가 정화 과정을 이루고 밸런스를 맞추게 된다. 하지만 하위층, 즉 천민층이 늘어나는 속도가 가속화 됨에 따라서 사회는 완전한 천민자본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극심하게 겪은 나라가 바로 인도인데, 수백년간 유지되어온 카스트 제도로 인해 하위층은 하위층끼리 평생 교류하며 살아가야만 했고, 이들이 문화 매체의 대부분을 장악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예절이나 도덕, 인간성과 같은 고위 문화는 전부 사라지고야 말았다. 이처럼 천민층이 문화를 주도하게 되고, 이를 견제하거나 정화하는 사회 계층이 없는 국가는 완전한 천민 주의에 빠지고야 마는 것이다.